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웃지 않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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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시험이란 걸 치르고는 100점이라 당당히 |
쓰여있는 시험지를 들고 갔을 때에도.. |
평생의 아버지의 꿈이라고 하셨던 명문 대에 입학 했을 때에도.. |
저에게 "수고했다.. 자랑스럽다.." 이런 말씀조차 안 하셨던 그런 분이셨거든요. |
부푼 기대를 안고 조심스레 들고 갔던 그 시험지도 그 합격 통지서도 아버지에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셨죠. |
딸만 둘이었던 집에 또 막내가 딸이 태어났으니 아들을 기대하셨던 |
아버지에게 나란 존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들을 대신 할 수 없는 그런 딸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제와 고백하지만.. |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단 한번도 아빠라고 부를 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
아버지가 싫고 미워서 대학에 들어가서는 하는 일 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반항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엄하게 꾸짖으셨고, 매도 드셨었죠. |
매를 맞을 때마다.. 반성을 하기보다는 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
그때는 제 다리에 드는 멍 때문에 아버지 가슴에 드는 피멍을 못 봤었거든요. |
그 후, 아버지와 저 사이에 생긴 골은 더 깊어만 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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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년 전쯤.. 아버지가 당뇨라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
항상 주말이면, 등산도 하시고 음식도 항상 싱겁게 드셨는데 갑자기 당뇨라니.. |
그리고 당뇨 라는 것을 알고 얼마 후에는 당뇨의 합병증인 협심증으로 큰 수술까지 받게 되셨습니다. |
수술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위해 엄마와 언니들 그리고 제가 돌아가면서 |
병실을 지켰습니다. |
넉넉치 못한 형편에 늘 바빴던 엄마와 언니들이지만, 항상 병실에 들러 혼자서 |
적적하실 아버지의 말동무와 병수발을 들곤 했었죠. |
어느날은 학교가 끝나고 병원에 가보니.. 늘 오던 엄마와 언니들이 저녁까지도 |
들르지 않더군요. |
아버지와 저.. 둘만 있는 병실에서 부녀 지간이 이렇게 어색 할 수도 있을까 |
할 정도로 그렇게 어색했습니다. |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그전보다 대화를 안 했던 아버지와 저 사이에 이렇게 |
단둘만 있던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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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의 침묵 끝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저를 아버지가 부르셨습니다. |
그리고는 이제 집에 가보라고 혼자 있어도 되니까 집에 가라고 그러시더군요. |
그 말을 듣고 겉옷을 입고 있는 저에게 아버지가 작은 쪽지 한 장을 |
건네셨습니다. |
가면서.. 심심할 테니 읽어보라고 하시며.. |
그 쪽지를 대충 주머니에 넣고 아버지를 보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인사를 |
건네고는 병실을 나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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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30분 넘게 오지않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
문득, 아버지가 건네신 작은 쪽지가 생각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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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내야.. |
요즘은 내가 아파서인지 네 얼굴을 더 자주 못 보는 것 같구나. |
하루종일 병원에서 지루한 시간을 달래려고 참 많은 생각을 한단다. |
네가 처음 태어나던 날이 생각나는구나. |
셋째도 딸이라 실망이 컸지만, 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
없어졌단다. 엄지 손가락을 빨며, 태어난 너를 보니 유리가 태어 났을 |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났단다. |
네가 처음 그 작은 입으로 '아빠' 라고 불러주었던, 그 순간의 기쁨은 |
늘 아빠의 가슴속에 남아있단다. |
아빠가 60 평생을 살면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냐고 누군가 물으면 |
유치원에서 네가 처음으로 그렸던 그림을 보여준 날이었다고 얘기하고 |
싶구나. 수퍼맨의 옷을 입고는 활짝 웃는 그림... |
그리고 그 그림 속의 주인공이 나 라는 걸 알았던 날이었지. |
어릴 적 너는 나에게 "아빠는 늘 다해주니까.. 수퍼맨" 이라고 |
그렇게 얘기 하곤 했었지. 기억나니? |
막내야.. |
아빠가 다른 아빠처럼 우리 막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해줬구나. |
하지만, 아빠는 이세상의 누구보다 우리 막내를 사랑한단다. |
항상 아빠를 기쁘게 하는 딸이었거든. 아빠는 항상 막내때문에 웃었단다. |
아빠가 퇴원하면 같이 등산 한번 가지 않을래? |
막내야..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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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여진 편지를 병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읽으며.. |
눈물이 마를 만큼 수없이 흘리며 주저앉아 울었는지 모릅니다. |
얼마나 쪽지의 매듭을 풀러 읽어보고.. 또 접기를 반복하였는지.. |
접혀진 부분마다 희미한 글씨들.. |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막내"라는 어릴 적 저의 이름 같던 호칭. |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 "네가 자랑스럽구나.." 라는 아버지의 이 말 한마디를 |
듣기 위해 그토록이나 열심히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리고 저는 아마도 쭉 아버지를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
저 역시 아버지를 닮아 표현을 못할 뿐이었는지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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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어린시절에는 나의 우상이었고.. |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던 지난날에는 그저 나에게 장애물이라 생각되던 |
아버지.. |
제 나이 스물 다섯에 비로소 아버지 당신을 이해합니다. |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
함께 걱정하고 함께 미소 짓는 친구가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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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보며 세상을 봅니다. |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셨고, |
살다 보면 나와 뜻이 맞지않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
내 삶 한 모퉁이에서.. |
언제나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당신. |
이제는 마음속에만 머물렀던 말을.. 소리 내려 합니다. |
사랑합니다. |
이젠 제가.. 당신의 수퍼맨이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