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잔잔함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웃지 않으십니다..(퍼옴)

밤나무골 2007. 1. 31. 15:03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웃지 않으십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시험이란 걸 치르고는 100점이라 당당히 
쓰여있는 시험지를 들고 갔을 때에도..
평생의 아버지의 꿈이라고 하셨던 명문 대에 입학 했을 때에도..
저에게 "수고했다.. 자랑스럽다.." 이런 말씀조차 안 하셨던 그런 분이셨거든요.
부푼 기대를 안고 조심스레 들고 갔던 그 시험지도 그 합격 통지서도 아버지에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셨죠.
딸만 둘이었던 집에 또 막내가 딸이 태어났으니 아들을 기대하셨던 
아버지에게 나란 존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들을 대신 할 수 없는 그런 딸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래서..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제와 고백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단 한번도 아빠라고 부를 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아버지가 싫고 미워서 대학에 들어가서는 하는 일 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반항하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엄하게 꾸짖으셨고, 매도 드셨었죠.
매를 맞을 때마다.. 반성을 하기보다는 분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때는 제 다리에 드는 멍 때문에 아버지 가슴에 드는 피멍을 못 봤었거든요.
그 후, 아버지와 저 사이에 생긴 골은 더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다가 2년 전쯤.. 아버지가 당뇨라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항상 주말이면, 등산도 하시고 음식도 항상 싱겁게 드셨는데 갑자기 당뇨라니..
그리고 당뇨 라는 것을 알고 얼마 후에는 당뇨의 합병증인 협심증으로 큰 수술까지 받게 되셨습니다. 
수술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위해 엄마와 언니들 그리고 제가 돌아가면서 
병실을 지켰습니다.
넉넉치 못한 형편에 늘 바빴던 엄마와 언니들이지만, 항상 병실에 들러 혼자서
적적하실 아버지의 말동무와 병수발을 들곤 했었죠.
어느날은 학교가 끝나고 병원에 가보니.. 늘 오던 엄마와 언니들이 저녁까지도
들르지 않더군요.
아버지와 저.. 둘만 있는 병실에서 부녀 지간이 이렇게 어색 할 수도 있을까 
할 정도로 그렇게 어색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그전보다 대화를 안 했던 아버지와 저 사이에 이렇게 
단둘만 있던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한참동안의 침묵 끝에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저를 아버지가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집에 가보라고 혼자 있어도 되니까 집에 가라고 그러시더군요.
그 말을 듣고 겉옷을 입고 있는 저에게 아버지가 작은 쪽지 한 장을 
건네셨습니다.
가면서.. 심심할 테니 읽어보라고 하시며..
그 쪽지를 대충 주머니에 넣고 아버지를 보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인사를 
건네고는 병실을 나왔습니다.
 
병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30분 넘게 오지않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아버지가 건네신 작은 쪽지가 생각났습니다...
 
" 막내야..
요즘은 내가 아파서인지 네 얼굴을 더 자주 못 보는 것 같구나.
하루종일 병원에서 지루한 시간을 달래려고 참 많은 생각을 한단다.
네가 처음 태어나던 날이 생각나는구나.
셋째도 딸이라 실망이 컸지만, 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없어졌단다. 엄지 손가락을 빨며, 태어난 너를 보니 유리가 태어 났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이 났단다. 
네가 처음 그 작은 입으로 '아빠' 라고 불러주었던, 그 순간의 기쁨은
늘 아빠의 가슴속에 남아있단다. 
아빠가 60 평생을 살면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냐고 누군가 물으면 
유치원에서 네가 처음으로 그렸던 그림을 보여준 날이었다고 얘기하고 
싶구나. 수퍼맨의 옷을 입고는 활짝 웃는 그림... 
그리고 그 그림 속의 주인공이 나 라는 걸 알았던 날이었지. 
어릴 적 너는 나에게 "아빠는 늘 다해주니까.. 수퍼맨" 이라고
그렇게 얘기 하곤 했었지. 기억나니?
막내야..
아빠가 다른 아빠처럼 우리 막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해줬구나.
하지만, 아빠는 이세상의 누구보다 우리 막내를 사랑한단다.
항상 아빠를 기쁘게 하는 딸이었거든. 아빠는 항상 막내때문에 웃었단다.
아빠가 퇴원하면 같이 등산 한번 가지 않을래?
막내야.. 사랑한다..."
 
그렇게 쓰여진 편지를 병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읽으며..
눈물이 마를 만큼 수없이 흘리며 주저앉아 울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쪽지의 매듭을 풀러 읽어보고.. 또 접기를 반복하였는지..
접혀진 부분마다 희미한 글씨들..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막내"라는 어릴 적 저의 이름 같던 호칭.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 "네가 자랑스럽구나.." 라는 아버지의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그토록이나 열심히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마도 쭉 아버지를 사랑했는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아버지를 닮아 표현을 못할 뿐이었는지도요..
 
철없던 어린시절에는 나의 우상이었고..
당신의 기대에 어긋나던 지난날에는 그저 나에게 장애물이라 생각되던
아버지.. 
제 나이 스물 다섯에 비로소 아버지 당신을 이해합니다.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걱정하고 함께 미소 짓는 친구가 되겠습니다.
 
당신을 보며 세상을 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처럼 느낄 수 있게 해주셨고,
살다 보면 나와 뜻이 맞지않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 삶 한 모퉁이에서..
언제나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당신.
이제는 마음속에만 머물렀던 말을.. 소리 내려 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젠 제가.. 당신의 수퍼맨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