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 벽이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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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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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
이 흰 바람벽에 |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
이 흰 바람벽에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
이 흰 바람벽엔 |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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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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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싯귀를 볼 때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떠오른다. |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도 생각난다. |
불가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길로 '버리고, 비우고, 덜 가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
마하트마 간디는 평생 물레와 안경 하나를 가졌고, 성철 스님은 열반 길에 누더기 장삼 한 벌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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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취직하고 아버지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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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 집도 돈을 좀 모아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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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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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집안에 돈 들어오면 글 읽는 소리가 끊기는 거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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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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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대처에서 서점 경영, 출판사 직원으로 떠돌다 나이 서른에 농사 짓겠다 고향에 들어가 이듬해 장가를 가셔서 우리 형제를 낳고는 도저히 살림이 나아지지 않자 금융회사에 취직하셨던 아버지, 30년을 은행권에 계셨고, 은퇴 전 3년 동안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억의 대출 승인을 결재하셨던 분이다. |
충청도가 고향이고, 평생을 충청도에서 사신 아버지 덕에 우리는 아버지 직장 지점을 따라 석구석 안 가본데 없이 다니며 살았다. 요즘 '떴다'하는 천안에서만 아버지는 7년을 지점장으로 일하셨고, 수 백억 짜리 토지 거래를 성사시킬 만큼 이재에 대한 안목도 있으셨던 분이 땅 한 평 사지 않고, 내내 관사 생활만 하셨다. |
어째 그리 가난하였을까? 우리 형제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월사금을 제 때 내 본 적이 없었다. |
그 곁에 우리 어머니, 운전면허를 따시고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점포장을 하시고, 우리가 모두 취직을 하고 난 뒤에도 남의 집 파출부 일을 하시거나 분식집 설거지를 하러 다니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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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썩을 육신 아끼면 뭐해. 나 다니는 집 사람들 네가 뭐 하는 사람인 줄도 알고, 네 동생들 고등학교 선생인 것도 안다. 없어서 이리 한대도 서러울 것 없지만, 건강해서 일 하는 건데 뭐가 부끄럽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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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경제위기 때 명퇴하신 아버지는 근 1년 집에서 글씨를 쓰거나 산에 다니시는 것으로 소일 하시고 가끔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로 의관을 정제, 외출을 하시다가 과거를 감춘 이력서를 쓰시고는 3년 전부터 집 근처 아파트 경비원 일을 하셨다. 명절에 대전에 내려가면 아버지 계시는 곳부터 들르곤 하였는데 감청색 점퍼에 완장을 차고, 노란 색실로 테두리를 두른 모자를 쓰신 모습을 뵐 때 마다 속이 안 좋았다. |
"집에 있기 갑갑하다"시며 "건강해서 할 일이 있으니 이 또한 홍복이라"하셨는데 엊그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만 나오라는 말씀을 들었다 한다. 신사(辛巳)년 뱀띠시니 올 해 예순 다섯, 높은 연세가 아닌데... 답답하셔서 어찌 하실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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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 셋, 공주 살다가 대전에 집을 사서 이사했는데 유천동 금하방직 건너편 동네였다. 그때 돈 천이백오십만원, 천장 높은 집에 살게 되었다며 좋아하신 어머니, 앞마당에 개를 키울 수 있어서 즐거웠던 우리 형제들.. 거기에 나무도 심고 박도 심고, 토끼도 길렀는데... |
딱 1년 살다 홍성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한 뒤로도 천안 등지를 전전하다 임원으로 승진하시어 15년 만에 다시 대전으로 오게 될 때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낡을 만큼 낡고, 궁벽한 나머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나 별반 달라진 게 없이 남루한 그 동네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시겠다 하셨다. 머리가 큰 우리 형제들은 새로 개발된 둔산 쪽이나 같은 동네라도 아파트가 어떻겠느냐 하였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한사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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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커 무엇하며, 아파트 보다는 흙 밟고 사는 게 편하다. 너희 넷 낳고 키우면서 처음으로 장만한 집다운 집인데.. 1년 살고 남한테 세만 주었으니 아깝지 않니?" |
하시며 동네 미장이 아저씨를 모셔다가 낡은 데만 손을 보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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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겨우 서너 차례 집에 내려간다. 그 때 마다 확확 변해가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
생이 끝날 때 양친의 반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 |
내 삶은 왜 이다지도 기름지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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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간에 백 석 시인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 다시 묶여 나온다는 기사가 실렸길래 가난하고 높되 외롭거나 쓸쓸하지만은 않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
아버지,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