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잔잔함

흰 바람 벽이 있어...(퍼옴)

밤나무골 2007. 1. 31. 15:07
흰 바람 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이 싯귀를 볼 때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떠오른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도 생각난다.
 불가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길로 '버리고, 비우고, 덜 가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평생 물레와 안경 하나를 가졌고, 성철 스님은 열반 길에 누더기 장삼 한 벌 남겼다.
 
 내가 취직하고 아버지께
 
"이제 우리 집도 돈을 좀 모아야겠어요"
 
 했더니
 
"선비 집안에 돈 들어오면 글 읽는 소리가 끊기는 거여"
 
 하셨다.
 
 20대를 대처에서 서점 경영, 출판사 직원으로 떠돌다 나이 서른에  농사 짓겠다 고향에 들어가 이듬해 장가를 가셔서 우리 형제를 낳고는 도저히 살림이 나아지지 않자 금융회사에 취직하셨던 아버지, 30년을 은행권에 계셨고, 은퇴 전 3년 동안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억의 대출 승인을 결재하셨던 분이다.
 충청도가 고향이고, 평생을 충청도에서 사신 아버지 덕에 우리는 아버지 직장 지점을 따라 석구석 안 가본데 없이 다니며 살았다. 요즘 '떴다'하는 천안에서만 아버지는 7년을 지점장으로 일하셨고, 수 백억 짜리 토지 거래를 성사시킬 만큼 이재에 대한 안목도 있으셨던 분이 땅 한 평 사지 않고, 내내 관사 생활만 하셨다.
 어째 그리 가난하였을까? 우리 형제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월사금을 제 때 내 본 적이 없었다.
 그 곁에 우리 어머니, 운전면허를 따시고도 내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점포장을 하시고, 우리가 모두 취직을 하고 난 뒤에도 남의 집 파출부 일을 하시거나 분식집 설거지를 하러 다니셨다.
 
 "죽으면 썩을 육신 아끼면 뭐해. 나 다니는 집 사람들 네가 뭐 하는 사람인 줄도 알고, 네 동생들 고등학교 선생인 것도 안다. 없어서 이리 한대도 서러울 것 없지만, 건강해서 일 하는 건데 뭐가 부끄럽니?"
 
 IMF 경제위기 때 명퇴하신 아버지는 근 1년 집에서 글씨를 쓰거나 산에 다니시는 것으로 소일 하시고 가끔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는 일로 의관을 정제, 외출을 하시다가 과거를 감춘 이력서를 쓰시고는 3년 전부터 집 근처 아파트 경비원 일을 하셨다. 명절에 대전에 내려가면 아버지 계시는 곳부터 들르곤 하였는데 감청색 점퍼에 완장을 차고, 노란 색실로 테두리를 두른 모자를 쓰신 모습을 뵐 때 마다 속이 안 좋았다. 
  "집에 있기 갑갑하다"시며 "건강해서 할 일이 있으니 이 또한 홍복이라"하셨는데 엊그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만 나오라는 말씀을 들었다 한다. 신사(辛巳)년 뱀띠시니 올 해 예순 다섯, 높은 연세가 아닌데... 답답하셔서 어찌 하실 것인가?
 
 내 나이 열 셋, 공주 살다가 대전에 집을 사서 이사했는데 유천동 금하방직 건너편 동네였다. 그때 돈 천이백오십만원, 천장 높은 집에 살게 되었다며 좋아하신 어머니, 앞마당에 개를 키울 수 있어서 즐거웠던 우리 형제들.. 거기에 나무도 심고 박도 심고, 토끼도 길렀는데...
 딱 1년 살다 홍성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한 뒤로도 천안 등지를 전전하다 임원으로 승진하시어 15년 만에 다시 대전으로 오게 될 때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낡을 만큼 낡고, 궁벽한 나머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나 별반 달라진 게 없이 남루한 그 동네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시겠다 하셨다. 머리가 큰 우리 형제들은 새로 개발된 둔산 쪽이나 같은 동네라도 아파트가 어떻겠느냐 하였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한사코
 
 "집이 커 무엇하며, 아파트 보다는 흙 밟고 사는 게 편하다. 너희 넷 낳고 키우면서 처음으로 장만한 집다운 집인데.. 1년 살고 남한테 세만 주었으니 아깝지 않니?"
 하시며 동네 미장이 아저씨를 모셔다가 낡은 데만 손을 보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1년에 겨우 서너 차례 집에 내려간다. 그 때 마다 확확 변해가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생이 끝날 때 양친의 반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
 내 삶은 왜 이다지도 기름지단 말인가?
 
 며칠 전 조간에 백 석 시인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 다시 묶여 나온다는 기사가 실렸길래  가난하고 높되  외롭거나 쓸쓸하지만은 않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불효자 용서하옵소서.